2025.11. 2.
2025.11. 2.
— 바트 크로징겐에서 시작된 관계와 도시 이해의 첫걸음
재미미디어 | 권석진 기자
입력 | 2025년 11월 2일 06:00
[기사원문]
일요일 오후, 예상치 못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로버트 매글(Robert Magel)’. 자이로토닉 트레이너이자 이 지역 라인탈(Rheintal) 클리닉에서 활동 중인 마스터였다. 그는 SNS를 통해 우리의 독일 방문 소식을 접했고, 직접 인사를 전하고 싶다며 숙소 근처로 찾아오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계획되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이 여행의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느껴졌다.
오후 세 시 무렵, 숙소 문 앞에 한 남성이 섰다. 단정한 차림에 과하지 않은 미소. 첫 인사는 간결했다.
“Welcome to Bad Krozingen.”
그 한마디에 이곳이 ‘방문지’가 아니라, 잠시 머무는 ‘생활 공간’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숙소에서 라인탈 클리닉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상 거리로는 약 2.3킬로미터, 천천히 걸으면 30분 남짓한 거리였다. 그는 굳이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 이 도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바트 크로징겐이라는 소도시의 구조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쪽은 온천 지구예요. 이 길 끝에 라인탈 클리닉이 있고, 오른편으로 가면 프라이부르크로 향하는 열차 노선이 나옵니다.”
그의 설명은 관광 안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이곳에서 생활해온 사람의 일상적인 동선 소개에 가까웠다. 말이 이어지는 동안 주변 풍경은 고요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노인,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부부,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 도시 전체가 마치 속도를 늦춘 채 숨을 고르고 있는 듯했다.
걷다 보니 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바트 크로징겐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역 주변에는 눈에 띄는 상업시설도, 번화한 광장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정류장과 넓은 주차장, 그리고 철로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에는 막막함이 앞섰다. ‘이곳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그 ‘비어 있음’이 이 도시의 질서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로버트는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독일의 많은 소도시 기차역은 기능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지하 통로를 지나야 비로소 마을의 중심 공간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역 앞에 모든 것을 몰아두지 않는 구조. 이동과 생활, 치료와 휴식의 영역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었다.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이 설계는, 독일 사회가 공간을 다루는 방식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었다.
클리닉 인근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의 일상과 자이로토닉 트레이너로서의 활동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주었다. 이 지역에서 재활과 움직임 교육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의료 시스템과 신체 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협력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이후 이어질 교육 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됐다. 단순한 개인 수업이 아니라, 지역 전체의 건강 시스템 안에서 자이로토닉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날 저녁은 숙소로 돌아와 전날 마트에서 사 온 재료로 간단히 해결했다. 익숙하지 않은 주방이었지만, 조용한 저녁 시간은 하루를 정리하기에 충분했다. 샤워를 준비하다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마주했다. 전날 설치해 둔 샤워기 필터가 하룻밤 만에 변색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하얗던 필터는 회색빛 물질로 가득 차 있었다. 석회질이 많은 독일의 수질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아, 이래서 필터가 필수구나.”
단순한 생활 팁 하나를 몸으로 배우는 순간이었다.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주방용 필터까지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여행은 결국 이런 사소한 경험들을 통해 생활로 확장된다.
해가 지며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스며들었다. 내일은 렌터카를 픽업하는 날이었고, 동행인 MZ는 스위스 바젤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일정과 방향으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점. 이 도시에 도착한 첫날의 긴장과 낯섦은 서서히 사라지고, 이제는 ‘적응의 시간’을 지나 ‘움직임의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날의 만남은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한 사람, 그리고 그와 함께 걸은 30분 남짓한 시간은 이후의 독일 일정 전반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됐다. 여행은 장소를 이동하는 일이 아니라, 관계와 맥락을 하나씩 배워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하루였다.